학교에서 보물찾기/고등 사회문화 수업

[사회문화] 실재론과 명목론(feat. 2022 카타르 월드컵)

지지파 2022. 12. 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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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과 명목론은 사회문화에서 내용이 어렵지 않지만 시험 문제도 잘 나오고 사회 현상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주제이다. 

실재론과 명목론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실재론은 사회가 실재한다고 주장한다.(그러니까 실재론이겠지). 실제로 존재하니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결정하며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 구조의 영향 아래서 있다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이렇게 묻는다.

"독도는 어느 나라 땅이지?"

"우리나라 땅이요."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땅이라는 것이지?"

"예."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어느 나라 땅이라고 생각할까?"

"한국 땅이요."

아이들이 웃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생각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배운대로 생각하기 쉽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학에는 조국이 없어도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라는 말도 있다. 자연과학자들에게도 자신의 속한 국가의 상황에 따라 판단하게 된다는 뜻을 것이다. 

다소 위험할 수는 있지만, 내가 꿈꾸는 좋은 학교는 이런 학교였다. 좋은 학교라면 어떤 학생이 들어오더라도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학교 말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도 비슷한 예일 것이다. 다른 나라 한 명의 몸값도 되지 않는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국민들의 일방적인 응원에 힘입에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줄줄이 이기고 4강에 갔었다.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도 군대에 들어가면 군기가 팍 들어 가기 마련이다. 사회라는 실체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그것이 한 발짝만 더 나가게 되면 전체주의로 가게 된다. 개인인 사회 전체를 위한 도구가 되고,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억압하게 된다.

 

앞서 좋은 학교는 그 나름의 좋은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문화를 가지고 있어, 어떤 학생들이 오더라도 훌륭한 인재로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한 거 같다. 내가 근무했던 안양고는 경기도의 명문학교였다. 상위권 대학만 많이 가는 학교가 무슨 명문학교냐고 비판할 수 있으나, 내가 경험한 안양고는 실로 인재의 산실이었다. '입학사정관제'를 위한 '자율동아리' 활성화 이런 거 하기 전에도 엄청나게 많은 동아리가 있었으며 3월 초는 신입 회원 모집으로 학교는 에너지가 넘쳤다. 남녀 분반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짝반, 남매반 등을 만들어 관계를 만들어갔고, 학교 인터넷 게시판에는 아이들의 치열한 논쟁들이 벌어지곤 했다. 생기부 기재가 중요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시사토론대회', '과학토론대회'에는 아이들의 참가 신청이 넘쳤고, 결승전에는 학생들이 몰려와 엄청난 열기 속에 토론이 이루어졌다. 대학에 간 선배들과 후배들 간의 네트워크도 잘 되어 있어 신입생 모집 날, 축제날, MT에 찾아와 후배들을 응원했다. 대학에 들어간 선배들은 한결같이 대학 축제가 너무 재미없다고, 고등학교 때가 재미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추석이 되면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폭죽을 사서 불꽃놀이를 하며 입시 스트레스를 풀었고, 수능을 앞두고는 엿깨기라는 큰 엿으로 머리를 내려치는 위험한 악습도 있었다. 

 

수업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거나 다른 짓을 하는 학생은 없었다. 35명 정도 되는 학생들의 눈동자는 조르르 나를 쫓아다녀 수업 시간 내내 긴장되었다. 아이들에게 다소 어려운 수행평가를 보았는 거의 30가지의 다양한 주제를 주고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고3임에도 엄청난 자료를 준비해와 수준 높은 발표를 하였다. 그렇게 1년을 비평준화 학생들을 가르쳐 보았다. 

그럼에도 나는 평준화를 지지했다. 안양고로 대표되는 지역 명문 학교를 가기 위한 고입 입시 부담이 중학교 교육을 망치게 하고 있으며 경기도/ 안양 지역에서 학생들은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따라 차별받고, 상처를 입는 것이 걱정되었다. 무엇보다 '안양고등학교'가 '명문고등학교'라면 나름의 교육 프로그램이 존재해야 하고, 그래서 이러한 전통이 잘 이루어지는 좋은 학교가 유지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에너지 넘치고, 좋은 문화가 사라지는 건 평준화된 후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평준화 1세대는 그래도 이름값이 있었기 때문에 우수한 학생들이 1지망에 지원을 했으나 2년 차부터는 '가까운 지역'을 우선으로 지원했고, 안양에서 교육열이 높은 평촌 지역 학생들은 평촌 지역 학교로 지원하면서 안양고의 수준은 급속히 떨어졌다. 수업의 질도, 동아리도, 홈페이지 게시판도, 축제도 모두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안양고의 자리는 외고라는 특목고등학교 차지하였다. 그 과정을 쭉 보았다. 

 

명목론은 사회가 이름값만 있다고 주장한다. 그 사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달라지면 사회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것이 스포츠 경기이다. 훌륭한 팀은 훌륭한 선수가 많은 팀이다. 명문 구단은 뛰어난 선수가 많은 구단이다. 그래서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지고, 선수 몇 명에 따라 팀 성적이 달라지게 된다. 물론, 팀 분위기, 지도자의 지도력, 팬들의 응원도 중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 개인의 기량이다. 

 

애써 어떤 운동경기를 찾아 보지 않는 나조차 월드컵 경기는 맥주를 한 잔 하며 보게 된다. 2022 월드컵의 한국 선수들을 보면서 유럽 국가 팀 못지않은 패스와 조직력도 훌륭하지만, 조규성, 김민재, 손흥민을 비롯한 국가대표 선수들의 피지컬이 외국 선수에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축구 강국 선수들이 공을 빼으려고 달라 들면 예전에는 무서워서 뒤로 돌리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좁은 공간에서도 드리블을 하고, 짧을 패스를 하며 빠져나오기도 하고, 과거 크로스 패스가 공 줄 때가 없어서 주는 것처럼 보여 올리고 나서 우리 선수가 받는 경우가 별로 없다면 지금은 대부분 잘 올리고, 잘 받는다. 유럽 진출 선수들이 많아지면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량이 향상되었으며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 4년 전 독일에서 이길 때도 잘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다. 단, 완벽한 찬스를 만들기 위해 슈팅 수가 적은 것은 아쉽다. 

결국 명문학교는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모인 학교이고, 선진국은 선진 시민 의식을 가진 국민들이 있는 국가이다. 그래서 민주시민교육 등이 요구되는 것이다. 개인이 시민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서. 

명목론은 개인의 자유 의지, 자율성 등을 인정하기는 좋지만 지나친 개인주의로 빠지거나 사회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있다. 사회는 그렇게 개인의 힘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누구도 사회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단연코. 

 

실재론이든, 명목론이든 백프로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실재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실재론으로 명목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명목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맞을 거 같다. 

 

나는 사실 개인의 변화보다는 사회 제도, 시스템을 중시하는 편이었던 거 같다. 그 사회 제도, 시스템이 마련되면 사람들은 그렇게 살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회 제도, 시스템을 어느 계몽 군주가 만든다 하더라고 사람들까지 전파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저항 역시 만만치는 않다. 그래서 그 사회 제도, 시스템을 사회 구성원의 동의를 통해 만들기 위해 개인의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그걸 어느 세월에 하겠는가. 축구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선수가 유럽, 남미 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70년은 걸린 거 같다. 어쩔 수 없다. 조급증을 버리고, 내가 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천천히 해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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